학습지 노동자로 사는 일
"선생님~~ 잠깐만요. 가시면서 이것 좀 버려줘~~~" 그러면서 나에게 쥐어 준 것은 똥기저귀가 가득 찬 쓰레기봉투....목구멍까지 올라 온 쌍욕을 억지로 삼키고 억지 웃음을 지으며 "오늘만이예요."라면서 뒤돌아 나왔다. 10년 동안 별의별 회원모를 만났지만 이런 강적은 처음이네 싶었는데 세월이 오래 흐르고 나니, 엘베 없는 4층에서 유치원생과 초등학교 저학년 아들 둘에 기저귀 차는 막내를 보느라 기미가 턱까지 내려와 있던 피곤한 얼굴을 안쓰럽게 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나이가 깡패라더니 이제 부처가 되어가는가 싶다.
얼마전 맘카페에 올라온 사연이 있었다.
“방문선생님이 오셔서 손도 씻지 않고 수업 시작하는데 찝찝해서 학습을 중단해야하는지? 말을 해서 씻으라해야하는지?”
참!!! 씁쓸하다. 나도 손씻으라고 욕실문부터 열어주는 회원맘들이 있다. 손이 늙어간다. 오늘도 난 9번 손을 씻고 수업을 했다. 투덜투덜
내가 학습지교사의 길에 선지 어느덧 15년이 다 되간다. 남편의 잘 안되는 사업에 조금 보탬이 되고자 딱 6개월만 하자고 다짐하며 가방을 들었다. 입회하나 퇴회하나에 웃고 울며 이제 학습지교사로 잔뼈가 굵어졌다. 일을 시작한지 10년이 거의 다 돼갈 무렵 남편이 아프기 시작했다. 이 일이 누가 대신해주고 병가를 내고 휴가를 낼 수 있는 처지가 아니고, 누군가 내일을 대신하면 수수료가 나에게 오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아픈 남편을 혼자두고 수업을 다녀야 했다. 암이라고 해도 나는 남편이 아픈상태로도 오래 우리곁에 있을 줄 알았던 것이다. 약값 병원비를 생각하면 하루도 쉴 수 없었다. 아프기 시작한지 한달만에 남편은 우리곁을 떠났다. 이렇게 일찍 떠날 줄 알았으면 그 시간을 함께 하는건데 후회를 했다. 수업을 안가면 나에게 십원도 나오지 앓는 수수료 제도를 원망했다. 잠시 휴직해도 생계비가 지급되는 일이었으면 이렇듯 후회를 안했을지도 모른다. 허망하게 남편을 보내고 나는 또다시 방문수업을 하고있다. 나에게 아픈 일이 있다는걸 부모로부터 들은 아이들이 나를 위로해줬다. 내눈을 보며 "괜찮아질거예요." 말하기도 하고, 안아주기도 했다. 이제 나는 아이들이 좋아져서 여전히 학습지교사를 하고 있다.
학습지교사로 이렇게 나이를 먹을 줄 꿈에도 몰랐다. 그 세월이 이제 20년을 훌쩍 넘었다. 그만두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도 다니다 보니 학습지 일이 이제 내 일이 됐다. 코로나19로 수업이 반토막이 나기전까지는 수수료는 낮았지만 교실이 꽉차서 일하는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엎친데 덮친격으로 주택지역의 미루고 미루던 재개발이 시작되면서 회원들이 이사를 가기 시작했고 다시 고민이 시작됐다. 다른 지역을 받을것인가? 다른 일을 시작할 것인가? 오늘도 부족한 생활비를 벌러 쿠팡 야간 알바를 간다. 남을 것인가? 떠날 것인가?
올 여름에 한 학습생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더라구요. 그래서 어찌저찌 전화 수업을 하고, 마무리 할 때 어서 나으라고 힘내라고 화이팅을 외쳐주었습니다. 아이가 자신을 걱정해주는 마음이 느껴젔는지 울먹여서 어머니가 대신해서 아이가 울컥했다고 얘기해주셨어요. 저도 아이키우는 입장에서 아이가 더 안쓰럽게 느껴지고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그리고 잘 나아서 그 일은 잊고, 평소처럼 수업하고 있었는데, 여름휴가 들어갈 때 어머니가 휴가 잘 다녀오라며 시원한 음료 쿠폰을 보내주셨더라구요. 일하다보면 가끔씩 같은 말을 반복하는 앵무새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는데, 이런 소소한 일들에 또 힘을 얻어서 일하게 됩니다.
학습지교사란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사람이지요. 지금도 바깥에서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직장에 계신 엄마한테는 1층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카톡을 보내면서도 혹시나 퇴회한다고 하면 어쩌나 걱정하면서 "아이들이 아직 오지 않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는대로 수업하겠습니다"라고 보내놨습니다. 아이들이 오겠지요???
비가 오는 날은 진짜 힘들어요. 젖어서 들어가기 싫어서 최대한 빨리 움직여서 잘 닦고 들어가는데 날씨까지 추워지니 그것도 싫어서 자차로 움직여요 ㅋㅋㅋ
3주연속 수업시간 10분 늦었다고 아버님께서 화가 나셨던가 봐요. 수업 마치고 나오는데 시간 왜 안 지키냐고 하셔서 이동시간으로 10분 정도는 양해 부탁 드린다고 했다가 아버님 고래고래 소리치시더라구요. “그건! 아줌마 사정이지!” ㅎ 슬프다기보다 어처구니가 없었죠. 아줌마라니.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네요.
“학습지 교사여서 받을 수 있었던 환대”
나는 현재 공공운수노조 공항항만운송본부 조직부장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동시에 아직 복직을 못하고 있는 18년 차 학습지 해고 노동자이기도 하다. 대학생 시절, 당시 3년의 휴학을 하고 복학했던 나는 학자금 대출상환 및 생활비로 취업이 급한 상황이었다. 나의 이런 사정을 알고 있던 친구는 학습지 교사라는 직업에 대한 정보를 주었고, 나는 1997년 대학교 4학년 2학기 도중 졸업 전에 대교 눈높이 방문학습지 교사로 일을 시작했다. 수학을 전공했지만 당시까지만해도 공개적인 자리에서는 말더듬이 심해서 학원 강사가 어려웠던 나에게는 1대1 수업이 대부분인 학습지 수학교사는 좋은 직업이 될 수 있겠다는 판단을 했었다. 그러나 막상 일을 시작하니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수월했으나 회사의 온갖 부당업무 지시는 나를 못견디게 힘들게했다. 결국 몇 년 후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학습지 회사의 부당업무 폭로로 계약해지를 당해 해고자가 되었다.
유독 회사의 횡포로 일하기 힘들었던 학습지 교사 초기 시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학습지 교사 일을 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은 나를 진심으로 기다리고 따뜻하게 환대해 줬던 “조국형, 조선미” 중고생 남매와 이들의 어머니였다. 특히 정성스레 손수 만들어서 내어주신 식빵피자와 주스는 그 시간까지 쌓인 높은 피로를 단숨에 날려 버렸다. 이들을 방문하는 요일의 맨 마지막 수업은 항상 이들이었다. 학습지 현장에 없는 지금도, 나는 가끔 이들을 추억 속에서 끄집어내 이들의 따뜻한 환대를 다시 느껴본다.
선생님:선생님 지난주에 교통사고 나서 정~말 죽을 뻔 했다.
회 원: 아.. 죽었어야 했는데....
선생님:선생님 죽어도 다른 구몬 선생님 오신다. 넌 구몬 절대 못 그만 둬...
회 원:그래요?!?!
이 이야기를 밖에서 듣고 있던 어머니. 수업 끝나고 선생님 너무 죄송하다면서 어쩔 줄 몰라 하셨지요. 그 아이는 제가 안 오면 구몬 그만 풀어도 되는지 알았나봐요. 요즘 게임하는 친구들은 죽는게 다반사라 죽었어야 하는데 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 줄도 모르는 듯.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컥 내려앉고 슬픈 마음이 들었지만 잘 넘어 갔네요 그 아이는 아직도 저랑 구몬 열심히 하고 초 6학년에 중3 인수분해 풀 정도로 엄청 잘 하는 친구가 되었어요!!!
월요일 태풍 힌남노 오는날~ 2주분 교재 준비하느라 바쁜데 온 문자 하나.
“선생님~ 비많이 온다는데 오지마세요~ 교재도 담번에 오실때 주세요~”
“어짜피 가는데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근데 추석 연휴라 2주분 교재입니다~”
“그러면 교재만 넣어주시고 언능 귀가하세요~ 위험해요. 교재는 제가 매일 시킬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맘이 따뜻해지는 하루였답니다. 가끔 이런 회원맘들 덕분에 할 만한 일인 것 같아요~
9월 첫날 회원모가 퇴회 문자를 보내 왔네요. 당장 그만 둔다고 연락이 왔네요. ㅠㅠ 아주 난감한 상황이였습니다. 아빠가 개입을 하면서 당장 그만 둔다고 해서 열심히 상담하며 제수수료는 환불해 주는 걸로 상담했습니다. ㅠㅠ
"맞아요~ 그쵸~" 라고 나의 이야기에 맞장구쳐주고 "선생님 어디 사세요?"라며 내가 사는 곳이 어디쯤인지 궁굼해하는 회원들과 "선생님~ 이거 드세요.(아이가 직접 냉장고에서 꺼낸 맛난 음료를 두손으로 건넨다)", "괜찮아." 라고 거절하면 "아니예요. 이거 꼭 가져가세요"라고 말해주는 7살 9살 회원들과 함께 할 때 행복합니다.

학습지 노동자로 사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