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munistleft 님 한테 받음
과학철학
철학으로서의 맑스, 과학으로서의 맑스 – 김진업 슈타이너사상연구소
퇴임사 비슷한 거 하나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졌는데, 얼마 전에 우리 학보사의 기자가 저한테 인터뷰 요청하는 메일이 왔어요. 그래서 아마도 은퇴 소감을 묻나 보다, 하고 메일을 열어봤더니 그게 아니고 "선생님 나가시고 나면 우리 학교의 정치경제학 강의가 없어질 것 같은데 그게 좀 두렵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하고 저한테 의견을 물으러 왔길래 제가 "아니 그건 남아 있는 선생님들한테 묻는 게 맞을 것 같다. 나는 곧 나갈 거니까." 그렇게 얘기하고 인터뷰를 거절을 했어요.
그러고 나서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어, 가만히 있어. 내가 나가면 정치경제학 강의가 없어질지도 모른다고?' 이런 생각이 갑자기 드는 거예요. 그리고 2007년인가 8년도에 김수행 선생님이 서울대학교를 퇴직하셨을 때 그때 논란이 됐어요. 아마 그 시기에 어떤 논란이 있었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을 것 같지는 않은데, 말하자면 서울대학교 경제학 교수가 굉장히 많은데 점차 정치경제학을 강의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는 거예요. 전임 중에는 김수행 선생님이 유일했고, 그래서 김수행 선생님이 퇴임하면 그 후임으로 정치경제학을 전공한 사람을 뽑아야 되겠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제법 있었는데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러면 나도 학교에다가 "정치경제학 선생님을 좀 뽑아주세요"라는 말을 목소리라도 한번 내보고 퇴임을 하는 게 맞겠다 싶어서 그 얘기를 좀 해보려고 그러다 우선 정치경제학이라고 하는 건 왜 공부해야 되나, 다른 경제와 관련된 굉장히 많은 것들이 있는데 그걸 왜 공부해야 하나, 인식을 먼저 해야 할 것 같고요. 그리고 특별히 성공회대학교가 정치경제학 강의를 지켜야 되는 이유로 이 생각에 이 질문을 좀 답을 해봐야 될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해 보니까 여기 학교에 95년도에 왔는데 94학년도에 1994학번이죠, 이 친구들이 성공회대 사회학과의 1기였어요. 그런데 그 뒤에 1999년도에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가 만들어졌고, 그러고 나서 그때부터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에 진보적인 교수들이 제법 있었기 때문에 학교가 나름대로 유명해지기 시작했어요. 이른바 성공회 학파라고 불리기도 했고요. 그리고 진보의 메카, 좌파 사관학교 (청중 웃음) 조금 그렇긴 한데 어쨌든 그런 이름으로 불리면서 우리 학교가 제법 유명해졌어요.
근데 학교가 유명해지니까 재미있는 현상이 하나 생겨났는데 우리 학교를 소신 지원하는 학생들이 많아지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이 소신지원한 학생들의 부모들 중에는 우리 사회에서 굉장히 고생을 많이 한 노동운동가 또는 사회운동가, 이런 부모들에게 등떠밀리거나 아니면은 부모님과 함께 손잡고 이 학교에 온 학생들이 제법 많아지기 시작한 거예요. 그래서 생각해 보니까 이 성공회대학교를 저는 처음에는 이게 교수의 대학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조금 시간이 지나다 보니까 이건 학생의 대학이 되었고 학부모의 대학이 됐고 결국은 우리나라를 조금이라도 발전시켜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대학이 되어 있었어요. 정말 놀랐어요.
그래서 이 학교를 지키는 일은 성공회대학교의 교수나 학생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를 조금이라도 개선해보려고 하는 사람이 요청하는 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제가 그래서 '성공회대학교는 사회과학을 지켜야 되고, 정치경제학을 지켜야 된다'라는 생각을 여러분과 함께 공유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맞습니까? (예)
근데 아마 그냥 얘기하면 여러분들이 일단 질문을 해야 될 거예요. 정치경제학이 뭐길래 '진보'라는 단어하고 연결이 돼 있나, 이런 생각 한번 해봐야 되잖아요. 여러분들은 정치경제 그러면 맑스의 경제학, 이런 뜻으로 대충 이해하고 있을 겁니다. 그러면 경제학이라고 하는 걸 스미스한테 배워도 되고 리카르도한테 배워도 되는데 왜 하필 맑스야? 그 사람의 주장이 특별히 좌파적이라서? 또는 좌우가 균형을 이루어야 되니까? 이런 생각 때문에 정치경제학을 공부하는 건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제법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 입장은 조금 다른데요. 정치경제학이라는 단어는 원래는 스미스와 리카르도가 최초로 경제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자신들의 학문에 이름을 붙이기를 "우리는 정치경제 한다" 이렇게 얘기를 했던 거예요. 그래서 정치경제학이라는 단어가 경제학이라는 단어보다 훨씬 먼저 나왔던 거죠. 그래서 경제학을 최초로 공부하고 연구서를 낸 사람들이 아담스미스, 리카르도인데 맑스가 그걸 공부하면서 보니까 '아, 이 사람들은 정말 과학자 맞다. 과학자 맞는데 좀 불충분하다.' 그래서 맑스가 스미스와 리카르도의 이론을 내재적 비판을 통해서 자본주의가 뭔지,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뭔지에 대해서 잘 연구한 다음에 자본론을 쓰게 되거든요. 그런데 이 자본론의 부제가 '정치경제학 비판'이에요. 여기서 정치경제는 당연히 아담 스미스와 리카르도를 얘기하는 거죠.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거냐 하면 자본론에서 맑스는 '나의 자본주의에 관한 이론은, 스미스나 리카르도도 제법 과학적으로 썼지만, 나의 이론은 훨씬 더 과학적이다.' 이렇게 주장을 했던 거예요. 말하자면 '과학'이라는 단어에 방점이 찍혀 있는 거죠.
근데 우리가 과학 이론, 그러면 예를 들어 상대성 이론이라든가 뉴턴, 아인슈타인 이런 사람들이 떠오를 거잖아요. 그러면 그 과학 이론에 대해서 그게 이데올로기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혹시나 있나요. 어쩌면 철학을 너무 열심히 한 사람 중에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간혹 있어요.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학이라고 하는 거는 이데올로기와 달리 객관적인 이론이고 이데올로기는 주관적일 수 있는 이론이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렇잖아요? 그래요. 맑스는 스스로 과학자라고 생각을 했던 거죠.
말하자면 자기의 이론이 과학 이론이라고 생각을 했으니까.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죠.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인류는 맑스를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있지 않습니다. 맑스는 과학자로 기억되는 게 아니라 사상가, 철학자 또는 이데올로그(이데올로기를 주장하는 사람) 정도로 이해되고 있는 거죠. 예컨데 bbc가 지난 천 년 동안 인류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철학자가 누구냐, 설문 조사를 했는데 맑스가 뽑혔어요.
당연히 그렇겠죠. 성경보다 더 많이 팔린 유일한 책이 '자본론'이니까 그럴 수 있죠. 근데 문제는 bbc가 맑스를 과학자라고 얘기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당연한 것 같지만 저는 굉장히 섭섭합니다. 굉장히 섭섭한데, 맑스를 이데올로그 또는 어떤 특별한 철학자, 좌파 철학자,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은 지금 여기 있는 모두에게도 어쩌면 공유되는 건지도 모릅니다. 예컨대 런던 교외에 가면 하이게이트라고 하는 공동 묘지가 있는데, 거기 맑스 묘지가 있거든요.
거기 공원 관리하는 사람들이 가끔씩 골치를 썩이는데, 왜냐하면 거기에 빨간 걸로 이렇게 낙서를 해놔요. 근데 맑스 묘비에다가 써놓은 낙서의 내용이 뭐냐면 "증오의 교리를 만들었다. 그래서 이 사람 때문에 인류가 굉장히 많은 갈등을 겪었다." 이런 거죠. 교리라는 말은 사실 이데올로기란 말이거든요. 독단적인 이데올로기라는 뜻이거든요. 여하튼 그렇게 맑스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 사람, 약자 편이라고 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긴 하지만 사회과학자 입장에서 봤을 때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냈다, 과학이 아니고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냈다, 그러면 이건 사실은 욕이죠.
약자 편이라고 하는 게 도덕적으로는 좋은 건지 모르지만 학자의 입장에서는 욕입니다. 여튼 그런데 맑스의 묘비명을 보면 이데올로기라는 말과는 전혀 반대되는 말이 적혀 있어요. 묘비명에 적혀 있는 걸, 여러분들 아마 "전 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이걸 먼저 떠올리겠지만 그 밑에 작은 글씨로 써 있기를, "지금까지의 모든 철학은 세계를 해석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실천이다. 세계를 변혁하는 거다." 이렇게 써 있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 귀절을 읽고 나서 대개는 '아, 이론보다 실천이 더 중요해'라고 생각하기가 쉬워요. 그런데 그 귀절이 어디에 쓰여 있는 거냐면 맑스의 '독일 이데올로기'라고 우리나라에 한글로도 번역돼 있는 책이 있어요. 거기에 그 맥락을 잘 살펴서 보면 "학문은, 지금까지의 학문들은 세계를 해석하기만 했는데 앞으로 내가, 지금부터 할 학문은 세계를 해석하는 학문이 아니라 세계를 변혁할 수 있는 실천적인 학문을 할 거다, 내가. 이래서 앞으로 내가 쓰는 글들은 말하자면 세계를 실천적으로 변혁할 수 있는 그런 학문을 하겠다."라는 선언을 그 앞에서 하고 있는 거죠.
그런데 그 학문이 실천적이다, 라는 게 무슨 뜻일까? 너무나 당연하게 우리는 학문은, 그걸 대표하는 게 철학이죠, 세계를 해석하는 거라고 생각을 해 왔었는데 학문을 실천적인 학문으로 만든다라고 하는 게 무슨 뜻일까? 질문을 해야 되거든요. 근데 그 질문에 대해서 제일 쉽게 답을 해주신 분이 우리 신영복 선생님이에요.
여러분들, 신영복 선생님의 목수 이야기를 혹시 아시나요? 들어보신 분 있을 거예요. 그 그림, 멋진 그림 있잖아요. 집 그림이 하나 있어요. 신영복 선생님의 서화집 같은 데 보면 집을 하나 그려놨는데, 그 그림에 대한 해설이 뭐냐면 감옥에서 만난 늙은 목수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자기 자랑을 하다가 "내가 옛날에 이런 집도 지었단 말이야" 그러면서 나뭇가지로 이제 운동장에다가 그림을 그리는데 제일 먼저 주춧돌을 그린 그리는 거예요.
주춧돌을 그리고 기둥을 그리고 그 다음에 서까래를 그리고 기와를 그리고, 집 짓는 순서하고 그림 그리는 순서가 똑같다는 거예요. 이게 왜 놀라운 일이냐면 보통 우리가 먹물들, 철학자죠, 먹물들은 그림을 그릴 때 위에서부터 아래로 그립니다. 그런데 일하는 사람들은 일하는 순서, 작업 순서대로 그림을 그리더라는 거죠. 이게 뭐예요. 이게 바로 실천적 학문이거든요.
왜 이게 실천적 학문이냐? 지붕 먼저 그린다라고 하는 건 자연의 원리에 어긋나는 거예요. 자연은 기둥 없는 지붕을 허용하지 않아요. 그렇잖아요. 그럼 이 자연의 원리를 이해하는 학문이 바로 실천적 학문이예요. 그게 뭐예요? 다 아시잖아요. 그쵸? 그게 과학이잖아요. 그게 과학이거든요. 그런데 철학이 왜 맑스 입장에서는 비판받아 마땅한 학문이냐? 세계를 해석하는 게 왜 문제냐? 그건 여러분들이, 예를 들어 한때 유행했던 말 중에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 아시잖아요. 우리 젊은 친구들은 그걸 비아냥거리려고 "아프리카 청춘이다"라고 그래서 그게 무슨 말인가 그랬더니, 그건 비아냥거리는 말이었더라고요.
아프니까 청춘이다... 그런데 철학은 바로 그런 거 거든요, 맑스가 보기에는. 제가 보기에도 어느 정도 그 말이 맞는 것 같고요. 어떤 뜻이냐 하면 세계를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우리를 위로해줘요. 위로는 참 고맙기도 해요. 그러나 잠시에요. 실제 문제는 해결되지 않아요. 따라서 철학이 우리한테 위로해주는 건요, 위로해준답시고 하는 이 말들은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덮는 데 그 역할을 하게 돼요. 위로 받았으니까. 그렇잖아요.
이게 바로 지금까지 철학은 세계를 해석하기만 했다, 문제는 세계를 바꿔내는 거다, 라는 맑스의 이야기입니다. 심리적 위로라고 하는 것은 물론 우리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나도, 나조차도 시를 좋아하고 노래를 좋아하고 위로를 받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건 위로로 끝나야지, 세계에 대한 설명이 되어서는 대단히 곤란합니다. 그게 세계에 대한 설명이 되는 순간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문제들을 덮어버리는데, 그래서 결국은 현재 있는 세계를, 주어져 있는 세계를 정당화하는 일에, 본인은 아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기여하게 된다는 거죠.
그래서 맑스는 철학을 이데올로기다, 라고 비판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고 보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실천적인 학문, 목수와 같은 그림이 필요한 거죠. 목수와 같은 그림을 그리는 작업 순서 같은 게 필요한 거죠. 그게 뭐라고요? 과학이죠. 맑스는 당시에 자연과학이 제법 발전하고 있던 시대를 살고 있었어요. 자연과학의 문제에 대해서 제법 많이 알고 있었어요. 맑스가 자연과학을 공부했다는 게 별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많이 공부했어요.
근데 자연과학의 특징은 뭐냐면, 예를 들어서 병에 걸렸을 때 자연과학이 아닌 의학 기술은 이른바 대증 요법을 쓰죠. 몸에 열이 나면 몸을 식혀준다든지 하는 방식이죠. 근데 과학은 그 원인을 찾아나섭니다. 대장균 때문이다. 이게 밝혀지면 어떻게 하면 대장균이 더 증식하지 않을 수 있는지, 그 방법들을 찾아내서 치료를 하는 거죠. 문제를 해결하는 겁니다. 원인을 찾아내기 때문에 우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는 거죠.
물론 원인을 찾았다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대개의 경우는 그렇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원인을 찾아내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이유는 뭐냐하면,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모든 것과 인과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인과관계라고 하는 게 자연에 존재하는 원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원인을 통제하면 결과를 막을 수 있다, 이런 거죠.
물론 인과관계라는 게 1대 1로 매칭되지 않는다는 거 여러분들 잘 알고 있어요. 굉장히 많은 원인들이 하나의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고 하나의 결과가 여러 가지 원인들을 만들어 낼 수 있고, 어떤 원인은 다른 원인을 만나서 세상에 아무런 결과가 안 나타나게 만들 수도 있어요. 굉장히 복잡한 거죠. 그거 하나하나 다 까져나가야 되는 거죠. 그래서 자연과학에서 원인을 찾는다, 라고 하는 건 원인이라는 것, 자연과학에서 원인이라는 것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힘이라는 뜻과 같아요. 그래서 원인이라는 말은 인과적 힘이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는 거죠.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힘이다. 이런 거죠, 원인이.
다른 걸 얘기하면 자연과학은 자연에 존재하는 인과적 힘들을 찾는 겁니다. 그래서 자연에 있는 모든 객체와 사물을 그 속성이 있다고 우리는 얘기하잖아요. 보통 객체는 다른 객체와 속성에 의해서 구별되는 거잖아요. 여기서 속성이 뭐겠어요. 자연과학자들은 그걸 그 객체가 가지고 있는 인과적 힘이라고 말을 하는 거죠. 자연과학은 객체에 존재하는 인과적 힘과 그 힘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느냐에 대해서 연구하는 학문이다. 원인과 그 원인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결과를 충분히 컨트롤할 수 있다. 통제할 수 있다. 이렇게 맑스는 과학을 이해했던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맑스의 과학 이해는 당대의 철학자들이 과학을 이해하는 것과 전혀 달랐어요. 근데 문제는 뭐냐하면 오늘날까지도 철학자들은 맑스 당대의 과학철학자들처럼 과학이라고 하는 게 뭔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나름대로 자기네들이 과학이 뭐라고 얘기를 하고 있는데, 많은 해석을 하고 있는데, 실제로 과학이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얘기하고 있지 않아요, 오늘날에도. 예를 들면 여러분들이 잘 아는 얘기 중에 과학은 경험되는 사실, 물리력이죠, 사실들의 규칙성을 찾는 거다, 물리력을 수학적 방정식으로 만들어 내는 거죠.
어떻게 보면 많이 맞는 것 같아요. 물리력을 수학적으로 표시하는 게 자연과학에서는 자연 법칙이니까요. F=ma 이런 식으로, 언뜻 보면 그게 맞아요. 근데 수학은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가 없어요. 여러분이 알다시피 모든 함수의 독립변수와 종속변수는 역함수에 의해서 바뀔 수 있는 거예요. 그게 원인인지, 결과인지 모르는 거예요. 그쵸? 그래서 물리학자들은 F=ma, 여기서 그치지 않아요. F가 원인인지 m이 원인인지 이런 걸 계속 찾아나서는 거거든요. 이게 물리학이라고 하는 과학이 하는 일이에요. 거기에 대해서 철학자들은 F=ma라고 하는 방정식에만 주목하고 있는 거죠.
또 다른 방식으로 과학을 오해하고 있는 게 이른바 여러분들이 제일 즐겨 쓰는 단어, 패러다임, 패러다임에 따라서 사람들이 다르게 세상을 볼 수 있다, 이런 식의 얘기잖아요. 마치 어떤 안경을 끼느냐에 따라서 자연이 다르게 보인다는 얘기잖아요. 그 말을 뒤집어서 얘기하면 과학도 철학처럼 인간에 의해서 세계를 해석하는 거다, 이런 뜻이고요. 이런 말들에 대해서 자연과학을 모르는 사람들은 대단히 열광하죠. "거봐, 과학자들이 객관적이라고 잘하는 척하더니 지들도 결국은 철학이야. 아, 통쾌해." (청중 웃음) 특히 과포자들(과학을 포기한 자들)은 얼마나 통쾌하겠습니까? 수포자들도 통쾌하겠지만. 그렇잖아요.
그런데 이게 웃을 일이 아닌 거죠. 과학자들이 볼 때는 자기들이 하고 있는 과학은 철학자들의 말에 따르게 되면, 내가 발견해낸 중력이라든가 원자라든가 이런 것들은 자연에 실재하는 것들이 아니라 내가 창조해낸 발명품이 돼버려요. 근데 과학자들 중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단 한 명이라도 있을까요? 자연과학자들은 원자가 나의 발명품이다, 라고 얘기하면 아마 과학을 그만두려고 그럴 거예요. 말도 안 된다고. 중력이라고 하는 게 빨간 안경을 끼면 중력이 있다가 파란 안경으로 바뀌면 중력이 없어져? 얘네들이 지금 뭐라는 거야... 자연과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한다고요.
그런데 우리는 과학을 자연과학자를 통해서 이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물론 요즘에는 유튜브를 보면, 제법 그럴 듯하고 정확하게 과학 정보를 전달하는 유튜브들이 있더라고요. 저도 즐겨보는 게 몇 개 있는데 그렇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하여간 과학을 누구를 통해서 이해를 하냐면 철학자를 통해서 이해를 해요. 과학이 뭔지 알려고 그러면 '프린키피아'를 봐야 되는데 그건 넘사벽이잖아요. 그러니까 과학철학 책 만만한 거 가지고 찾아서 봐요. 그러면 우리는 곧바로 과학에 대해서 오해하는 지름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철학자들이 말하는 과학은 정말로, 제가 아무리 열심히 살펴봐도 형편 없어요. 형편 없이 오해하고 있습니다. 여튼 그렇습니다.
과학자들은 자기네들이 자연을 발명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발견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근데 철학자들은 자꾸만 과학자들을 창조자라고 얘기를 하는 거죠. 자기들도 그걸 통해서 창조적이 되고 싶어서 그랬겠지만 그렇게 되었습니다. 근데 자연과학을 이렇게 철학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맑스는 일종의 실천적으로 이해했던 거예요. 자연과학은 병의 원인을 찾아서 결과를 바꿔낸다. 이거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죠.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맑스는 자연과학이라고 하는 거가 인간 사회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는 과학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해요. 사실은 그건 당연한 거죠. 왜냐하면 인간, 사회, 다 자연의 일부잖아요. 그럼 자연을 연구하는 자연과학이 왜 자연의 일부인 인간과 사회를 연구할 수가 없겠습니까? 너무나 당연한 거죠. 단지 철학으로부터 우리가 갖게 된 편견이 그걸 가로막는 거죠. 조금만 생각해보면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당시의 사람들은 맑스의 그와 같은 생각은 터무니없다고 생각했죠. 근데 문제는 당시의 사람뿐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는 어떠냐 하는 거예요. 우리가 인간과 사회가 자연의 일부라고 하는 이 사실을 정말 당연하게 믿고 있는 것처럼 보이세요? 제가 학생들하고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플라스틱이 자연이냐, 아니냐? (학생들이 대답하길,) 아니죠. 그럼 뭐야? 제가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플라스틱이 자연이 아니야? 어떻게 생각하세요? 너무나 당연하게도 우리가 그걸 자연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거든요. 플라스틱이 자연이 아니면 뭐라고 그래요? 그런 거죠.
예를 들면, 도시의 건축물, 당연히 자연이죠. 근데 왜 우리가 이 플라스틱이 자연이다, 라고 하면 너무나 당연한 생각에 의외라고 반응하게 되느냐? 너무나 오랫동안 철학자들이 우리한테 뭘 가르쳐 왔냐면, 인간과 자연은 다르다. 이원, 원래부터 두 가지다. 원래부터 한 가지가 아니라, 원래부터 두 가지다. 물질과 정신은 이원, 원래부터 두 가지다. 한 가지가 아니다. 이 말은 우주가 빅뱅에서부터 진화해서 지구를 통해서, 생물을 통해서 인간에게까지 오는 게 그 이유가 없다, 라고 하는 물리학을 부정하는 말이에요.
여러분들이 과학을 믿으면서, 실제로 과학을 믿는다는 게 어떤 데서 드러나냐면 만약에 대통령이 비가 안 와서 "온 국민들은 광화문 광장에 모이십시오. 지금부터 우주의 기운을 모아서 기우제를 지내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돼요? 탄핵되지. 당연한 거야. 근데 만약에 대통령이 "여러분 비가 안 와서 큰일 났습니다. 댐을 만들 수 있도록 세금을 좀 더 올려야 되겠습니다. 나무를 더 심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지. 그게 뭐예요? 여러분들은 과학을 믿고 있다는 거예요, 실제 행위에서는.
그런데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이상해져요. 생각이, 이제, 생각하면 이상해져요. 근데 그런 증거가 사실은 여러분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 학자들 속에서도 이런 편견이 엄청나게 많이 깔려 있어요. 여러분 사회학 개론 중에서 제일 유명한 책이 '현대 사회학'이라고 하는 베스트셀러 중에 베스트셀러거든요. 안토니 기든스가 쓴 책이에요. 근데 그 책 서문을 꼼꼼하게 읽어보시면 거기에 어떤 귀절이 나오냐면 뭐 어쩌고 저쩌고 하다가 "이런 점에서 사회학은 과학이기도 하고 철학이기도 하다." 이게 뭔 개소리야? (청중 웃음) 과학이기도 하고 철학이기도 하다니? 뭐하자는 거야, 이게? 근데 이게 사회학만 그런 거야?
결국 경제학은, 예를 들면 과학으로서의 경제학은 빈부 격차가 늘어났는지, 줄어들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해줄 수 있다. 그러나 과학으로서의 경제학은 빈부 격차를 줄여야 한다는 말을 할 수가 없다고 써 있어요. 이건 명시적으로 그 사람들이 주장하는 거고 여러분 표정을 보면 '당연한 거 아니야?'라고 생각하고 있단 말이에요, 지금. 말이 안 되는 얘기를 하고 있는데, 사실은.
그래서 예를 들어서 경제학자들은 멋있는 말로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이라는 말을 즐겨서 사용하죠. 어떻게 보면 좋아 보여요. 그러나 내 눈에는 그게 어떻게 보이냐면 '머리와 가슴이 분리돼 있구나.' 냉철한 머리가 어떤 판단을 하면 가슴이 뜨거워질 수 있는 거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가슴이 뜨거워지면 머리도 영향을 받아야 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에요. 이게 어떻게 분리가 돼요. 그런데 마치 자랑스럽게 분리가 가능하다고 얘기하는 거죠.
그래서 간단하게 요약을 하면, 오늘날의 대부분의 주류 학문은 이른바 사실의 과학과 가치의 철학, 이런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한테 아마 굉장히 익숙한 말일 겁니다. 사실과 가치는 유리됐고, 가치를 다루는 건 철학이고, 사실을 다루는 건 과학이다. 여러분 다 동의하잖아요. 그런데 플라스틱은 자연 아닌가요? 가치는 자연 아닌가요? 인간은 자연 아니란 말이에요? 이런 식의 질문들, 그쵸? 바로 이런 식의 질문들입니다. 어쨌든 맑스는 이런 식의 인간, 자연 이원론 또는 물질, 정신 이원론을 철저하게 비판을 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인간이든 가치든 뭐든 간에 모든 것을 자연의 일부로 다루는 거죠. 자연과학의 방법론이 모든 학문 속으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거죠. 자연과학이라고 하는 걸 당시의 사람들은 왜 좋아했냐면, 자연과학은 자연을 변형해서 살기 좋은 자연으로 만드는 보고라고 하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천적 학문이죠. 그럼 당연히 사회과학은 어때야 됩니까? 사회에 존재하는 팀들을 잘 이해해서 사회를 변형해서 살기 좋은 사회로 만드는 보고가 돼야 되는 거죠.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맑스는 믿었던 거예요.
그래서 맑스 입장에서는 자기가 사회과학을 잘 발전시키면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게 될 거라고 믿었던 거죠. 물론 좋은 사회라고 하는 거는 뭘 보고 좋은 사회라고 우리가 얘기하죠? 학생 입장에서는 사회를 변형한다, 궁극적으로 어떤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사회를 변형하는 것, 여러분 거기에 대해서 지금 '맞아, 그게 고민이야'라고 생각한다면 철학자들한테 아주 멋지게 속아 넘어간 겁니다.
우리 모두는 좋은 사회가 뭔지 다 알아요. 정말 모를 것 같아요? 다 알아요.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데요. 그걸 맑스는 뭐라고 표현했냐면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이렇게 얘기했어요. 그걸 조금 풀어서 얘기하면 사회를 사회에 국한해서, 사회라는 자연에 국한해서 풀어서 얘기하면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가 실현되는 사회다", 이걸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 도대체 있겠냐고요? 그러니 사회과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가 실현되는 겁니다.
이게 실현되는 거를 바로 진보라고 얘기를 하는 거죠. 근데 문제는 뭐냐 하면 철학자들이 자유와 평등이라는 것조차도 "이데올로기다, 하나의 주장이다. 하나의 가치 주장이다." 이렇게 얘기한다는 거예요. 이런 주장 속에는 굉장히 오랫동안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를 지배하고 있던 하나의 귀절이 있는데, 그리고 과포자들이 볼 땐 정말 멋있는 귀절인데,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해줄 수 없다." 멋있잖아요. 과포자 만세! (청중 웃음) 근데 과학은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가치라고 하는 건 인간만 갖고 있는 거예요? 아니거든요. 인간이 좀 복잡하게 가치를 갖고 있는 건 맞아요. 근데 여러분들이 침팬지 사회를 조금만 관찰해 보면, '아 저 녀석이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건 금방 알아요. 개만 키워봐도 알아요. 가치가 왜 인간의 전유물이에요? 그렇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생물들의 행동을 잘 살펴보면 거기에 제일 가치는 뭐예요? 생존이에요. 물질들은 아무런 가치 없이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것처럼 보여요. 근데 생물체들은 분명하게 가치 지향적인 행동을 한다는 거예요. 인간만 그런 게 아니라는 거예요. 가치 지향적인 행동을 해요, 인간이라고 하는 동물은, 물론. 인간은 조금 더 복잡해요.
그렇지만 어쨌든 자연을 연구하는 과학은 만약에 우리가 생태계 속의 모든 행동이 분자들의 운동으로 환원되지 않고 생물체들의 활동들이 있다는 걸 인정한다면 생태계라는 자연 속에는 이른바 비가치적 사실만 있는 게 아니라 가치적 사실도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당연히 과학은 자연 현상 중에 하나로 가치 현상을 다뤄야 되는 거죠. 너무나 당연한 게 아닌가요. 마음에 안 드세요? (청중 웃음)
게다가 우리는 흔히 가치와 사실이라고 하는 건, 사실로부터 가치를 추론한다거나 가치로부터 사실을 추론하는 건 논리적 오류라는 건 너무나 많이 배워왔어요. 그렇잖아요. 그래서 가치와 사실은 별개라는 게 머릿속에 꽉 박혀 있어요. 근데 여러분 조금만 생각해 보시면 그게 말도 안 된다는 걸 알 수 있게 돼요. 여러분 생태과학이 발전하고 나서 우리한테 어떤 새로운 가치가 생겼는지 아세요? 생태친화적이라고 하는 가치가 생겨나는 거 아세요, 모르세요? 아시잖아요. 과학이 발전하면, 사실에 대해서 우리가 많이 알게 되면 우리들의 가치 지향도 영향을 받아요. 인과적으로 연결돼 있다고요. 그런데 이거를 철학자들은 딱 잘라버리잖아요. 그러니까 뭐예요? 물질-정신, 인간-자연의 이원론, 이분법이에요.
여기에 속아 넘어가게 되면 사회과학은 절대로 과학으로 발전할 수가 없게 돼요. 동의하시나요? (예) 감사합니다. 자, 그렇게, 그런 속성들 중에 우리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굉장히 많은 인간의 자연적인 속성들이 있습니다. 이 자연적인 속성들 중에 대표적인 게 우리는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물론 개중에 고집스러운 사람도 있지만 입장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 제법 많아요. 웬만하면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힘을 가지고 있어요. 인간의 속성이에요, 자연적 속성.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하는 거가 항상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라고 하는 게 사실은 모든 혁명의 구호, 모든 역사적 반란의 구호였어요.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난 게 자유와 평등이에요. 자유와 평등이라고 하는 건 모든 역사의 혁명 구호였습니다. 이거를 지금 철학자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특정한 집단의 특정한 시대에 주관적인 이데올로기라고 말하는 게 과연 타당할까요? 그렇지 않거든요. 그건 정말로 역사적으로 증명되면 보편적인 거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들은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사회가 가장 좋은 사회고, 이른바 지속 가능한 사회라고 주장하는 거죠. 그러면 혁명가들만 그랬던가?
여러분 종교가, 세계 종교로 발전된 종교는 놀랍게도 그 가르침이 모두 다 똑같아요. 예를 들면, 불교는 부처님처럼 살아라. 그리고 서로서로 자비를 베풀어라. 그리고 기독교는 예수님처럼 살아라. 그리고 이웃을 사랑해라.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이걸 좀 멋진 시로 표현하면 이런 겁니다. 나무처럼 홀로, '자유롭게'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숲처럼 더불어, '평등하게'라는 뜻입니다. 자유와 평등. "나무처럼 홀로, 숲처럼 더불어" 이건 터키 시인의 시에요. 그렇지만 모든 종교 교리를 번역하면 그 시기적으로 얘기할 수가 있게 된다는 겁니다. 이건 인류, 인간종이라고 하는 자연종이 굉장히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던 자연적 속성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아마도 여러분들은 제 얘기를 철학의 이야기로 오해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청중 웃음)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모든 혁명이고 반란이고, 그 다음에 모든 종교들의 가르침이 일치한다는 걸 우리가 이데올로기라고 말하기는 너무 어려워요. 이거는 특정 집단과 특정 세계의 이데올로기라고 말하기는 어렵고, 오히려 그것보다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연적 속성으로 이해해야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인간의 속성은 모든 자연적 객체, 사물들의 속성과 마찬가지로 하나만 있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이기적 속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타적 속성도 가지고 있다. 이타적 속성도 가지고 있고 이기적 속성도 가지고 있다. 이건 분명하게 인정해야 돼요
그러면 질문은 이렇게 바꿔야 됩니다. 인간이 착한 거냐, 악한 거냐? 이건 철학자들이 하는 질문이고요. 과학자들은 뭐라고 질문을 하냐면, 인간은 착한 속성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자유 평등의 가치를 만들어낼 수도 있고, 악한 속성도 가지고 있어. 그래서 지배하려고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어요. 둘 다 있어. 문제는 뭐야, 왜 우리는 이 착한 속성이 실제 사회에서 실현되지 않느냐? 제가 과학이 뭐라 그랬어요? 힘과 힘의 작동 방식에 관한 연구라고 그랬잖아요. 착한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가 실현될 수도 있어야 되는데, 이게 어떤 다른 힘을 만나면 그 힘이 발휘되지 않고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해요. 그러면 우리가 질문해야 될 건 뭐예요?
자유와 평등의 가치, 착한 심성에서부터 비롯되는 자유와 평등의 가치가 어떤 힘 때문에 실현되지 않느냐? 그걸 묻는 게 과학이다, 라고 보는 거죠. 어떤 힘이 이 착한 마음이 이 세상에서 실제로 발현되는 것을 가로막고 있느냐? 또는 반대로 어떤 힘이 인간의 이기적 속성을 부추기고 있느냐? 이걸 연구하는 게 과학이라고 봅니다, 여러분. 실제로 맑스는 그 연구를 했어요. 맑스는 인간이란 무엇이냐, 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아요. 오히려 그거보다는 인간 정신과 인간의 행위에 자연과 사회가 영향을 미치는지, 안 미치는지를 검토한 거예요. 그리고 결론적으로 주어진 자연과 주어진 사회의 힘이 인간의 정신과 인간의 행위에 굉장히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대신에 이 얘기를 하기 위해서는 전제조건이 하나 필요하죠. 모든 인간은 주어져 있는 자연 속에서 살고, 모든 인간은 주어져 있는 사회 속에서 살지만 그 바깥으로는 못 나간다. 자연 바깥으로 못 나가고, 사회 바깥으로 못 나간다. 생존을 하려면 주어져 있는 자연, 주어져 있는 사회, 그런데 그 사회에 살게 되면 인간의 정신과 행위는 주어져 있는 자연과 사회에 영향력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이거예요. 맑스의 결론은 너무나 간단해요. 그게 사회과학이거든요. 그걸 맑스는 주어진 자연을 표현하는 단어가 '생산력'이라는 단어예요. 그리고 주어져 있는 사회를 설명하는 단어가 '생산 관계'예요. 그걸 조금 더 발전시켜서 생산력, 생산 관계, 생산 양식, 토대와 상부 구조... 토대란 말은 생산 양식이란 말과 같아요.
몇 가지의 개념들이 나왔잖아요. 근데 이 어려운 얘기들, 우리한테 필요 없어요. 오늘날 우리는 그걸 다 뭐라고 얘기해요. 사회 구조라고 얘기해요, 사회 구조. 사회 구조가, 여러분 구조적 힘이라는 걸 많이 쓰잖아요, 사회 구조가 우리를 이런 방식으로 행동하게 만든다, 사회 구조가 우리를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다들 알고 있는 얘기잖아요. 이 얘기의 원조가 누구냐고요. 맑스예요. 그게. 이렇게 생각하게 만든 원조가 맑스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맑스의 이론을 철학이라고 얘기하는 건 너무나 부당해요. 어떤 힘이 어떤 힘과 만나서 어떤 결과를 만드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사람 보고, 당신은 철학자라고 얘기한다면 죽어서 관에 있다가 깜짝 놀라서 뛰어 나올 거예요. (청중 웃음) 그거 아니고요. 그거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의미에서 보자 그러면 맑스의 학문은 최초의 사회과학, 진정한 의미의 최초의 사회과학이라고 불러도 조금도 틀리지 않을 겁니다. 실제로 그게 자본론에서는 어떤 식으로 나타나게 되냐면, 자본주의라는 사회 구조의 힘이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한테 어떤 영향력을 미치는지를 분석하는 책이에요, 자본론이라는 게. 그리고 오히려 부수적인 얘기지만 그 다음에 또 한 가지 나오는 얘기는 뭐냐 하면, 자본주의라는 사회 구조의 힘은 자본주의라는 사회 구조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자유와 평등을 실현할 수 없게 만든다, 라는 게 결론이에요.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자유와 평등이 실현된다고 얘기하잖아요. 자본주의가 아무리 엉망진창이 되더라도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잠깐만 기다려봐, 국가가 개입해서 개인이 망가진 거야. 그냥 내버려두면 정말 잘 살게 될 거야. 자유롭고 평등하게." 근데 그게 아니라는 걸 과학적으로 명론화한 책이 자본론입니다. 그렇지만 거기서 방점을 찍어야 될 점은 어떤 거냐면, 자본론의 결론이 아니라 자본론은 사회 구조라는 힘이 인간의 정신과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힘이다, 그걸 이해하는 거라는 거죠.
그렇지만 이제 조금 생각해 보시면, 아까 목표가 좋은 사회를 만드는 거다, 고 얘기했는데 과학도 궁극적으로는 좋은, 살기 좋은 자연을 만드는 거라는 걸 여러분들은 아마 개별 과학자들을 통해서 그 말은 엉터리라고 생각할 거예요. 개별 과학자들은 그럴 수 있어요. 그러나 과학이라고 하는 건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는 건데 결과에 관심 없이 원인을 찾으려고 할까요. 이런 거예요. 과학이라고 하는 게 결과에 관심이 없다면 왜 원인을 찾으려고 그러겠어요. 그래서 만약에 우리가 공적인 과학자 세계가 있다고 한다면, 사적 이해관계에 휘둘리는 과학자가 아니라, 공공의 과학자 집단이 있다면 그 사람들은 좋은 결과가 뭐냐에 대해서도 생각할 거라는 뜻입니다. 어쨌든 간에, 과학이라고 하는 건 결과에 관심을 갖고 있는 거고, 특별히 사회과학은 결과에 엄청난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좋은 사회를 만들려고 하는 궁극적인 목적을 가지는 건데, 문제는 과학이 사회를 해방시킬 수는 없다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과학이 사회를 해방시킬 수 있다, 그러면 뉴턴이 벌써 기후 위기 문제를 다 해결했겠죠. 그럴 리가 없잖아요. 회복시킬 수 없죠. 자연을 직접적으로 변형하는 거는 사람의 실천입니다. 그걸 우리가 노동이라고 부르고 있죠. 그리고 사회를 직접적으로 변형하는 건 실천입니다. 그걸 우리 뭐라고 불러요? 정치죠. 정치적 행위자, 정치와 노동이라고 하는 게 바로 직접적으로 자연과 사회를 변형시키는 활동입니다. 그러나 노동과 정치라고 하는 실천이 자기가 의도한 결과를 만들어내려고 한다 그러려면 반드시 과학의 도움을 받아야 되는 거죠. 과학은 존재하는 힘과 힘의 작동 방식을 가르쳐주니까 그걸 통해서 우리는 원하는 결과, 원하는 노동, 원하는 정치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거죠.
바로 그래서 맑스라고 하는 과학자는, 사실은 사회과학자 모두가 그런 거지만 실천과 분리되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실천 문제를 떠나서 과학만 한다는 게 거의 불가능한 거죠. 자나 깨나, 그럴 수밖에 없어요. 맑스도 마찬가지로, 그래서 이른바 맑스는 혁명가다, 라고 많이 들어본 얘기잖아요. 물론 나는 맑스는 혁명가다, 라는 얘기에 괄호를 칩니다. 어쩔 수 없이 혁명가가 된 거지, 타고난 혁명가는 아니다. 맑스는 타고난 과학자다. 이게 제 지론이지만 어쨌든 실천과 분리될 수는 없는 거죠. 근데 문제는 뭐냐면 과학이 자연에 존재하는 힘들, 그 힘의 작동 방식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했지만 자연에 존재하는 힘들 중에 극히 일부분만을 발견하고 있잖아요.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완전하게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힘들을 다 찾아내고 그 힘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를 알아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에요. 이건 시간이 지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자연 자체가 계속 변하고 있기 때문에, 우주 자체가 진화한다는 말은 우주 속에 새로운 자연적 힘들이 계속 만들어진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안 되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가 아직 그러니까 과학이 발전했다고 하더라도, 아직 알지 못하는 굉장히 많은 자연의 힘들이 작동하고 있다는 걸 인정해야 돼요. 그러면 우리는 과학이 완전히 발전할 때까지 실천을 멈춰야 될까요? 기다려야 될까요? 그럴 수 없잖아요. 그러니 우리는 비록 불확실하지만 선택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죠. 이게 바로 정치입니다.
그래서 정치는 실패할 수 있는 확률이 대단히 높은 거죠. 그러나 과학의 도움을 받아서 실천하는 정치가, 실패할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게 최선이라고 하는 걸 부정할 합리적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게 100% 확실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살아남으려면 일단 실천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 그게 바로 정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과학자로서의 맑스의 글 속에는 과학적 주장만 들어 있지 않아요. 굉장히 많은 어설픈 정치적 주장들이 들어 있습니다. 어설픈 정치적 주장들이 들어 있어요. 안 그럴 수가 없는 거예요. 그걸 여러분들이 인정한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될 일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맑스의 과학적 주장과 맑스의 정치적 주장을 잘 구별할 수 있어야 되죠.
아까도 얘기했지만 자연과 사회라고 하는 건 결코 고정돼 있지 않습니다. 지금도 계속 진화하고 있습니다. 바이러스 계속 변종 나오는 거 여러분 아시잖아요. 근데 인간 사회라고 하는 건 자연보다 훨씬 더 빨리 변화해요. 여러분 세대 차이를 느끼잖아요, 우리가. 세상이 얼마나 빨리 변합니까. 그런 겁니다. 근데 인간 사회가 변동한다는 건 결국 어떤 뜻이냐면 인간 사회 안에 존재하는 힘과 힘들의 작동 방식들이 계속 변한다는 뜻입니다. 무슨 뜻이에요? 사회과학은 맑스에게 물어보고 와서는 안 된다는 뜻이에요. 맑스의 사회과학은 계속해서 업데이트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에요. 너무나 당연한 거죠. 그런데 현실 속에서는 이게, 이 당연한 대로 되지 않죠. 맑스를 신봉, 신처럼 모시는 분들이 얼마나 많아요.
야, 맑스 사진을 밟지도 마. (청중 웃음) 장난쳐요? 자본론 찢어서 휴지로 써도 됩니다. 맑스가 좋아할 겁니다. 어쨌든, 예를 들면 이런 거죠. 맑스 당시에 혁명이라는 얘기를 하면서 혁명은 대중들의 일종의 폭동 형태로 나타날 거다, 이런 식의 얘기를 하잖아요. 당시의 대중을 생각해 보세요. 문자를 가지고 있습니까? 보통 선거권을 가지고 있습니까? 대중들은 유일하게 주체라고 한다면 동물적인 행동을 하는 저항 주체로서 밖에 존재하지 않았어요, 당시에 대중은. 당연한 거잖아요, 여러분. 일자무식인데? 그렇잖아요. 근데 여러분, 오늘날 대중은 어때요? 문자 다 가지고 있어요. 보통 선거권 다 가지고 있어요. 자기들끼리 토론하고, 자기들끼리 소집단 만들고, 시민사회단체 만들고 정당까지 만들어요. 이런 대중들이 당시의 대중하고는 완전히 달라진 거잖아요.
다른 말로 얘기하면, 사회가 변한다는 말은 사회 속에 존재하는 힘과 힘들의 작동 방식이 변한다는 거예요. 거기에 맞게 사회과학이 업데이트가 되어야 하는 거죠. 당연하죠.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맑스 당시에 이미 세계라고 하는 경제는 기본적으로 세계적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는 걸 알고는 있었어요. 그러나 오늘날 세계 체계는 당시 맑스 당시의 세계 체계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조직화돼 있을 뿐만 아니라 조직화돼 있기 때문에 세계 체계가 개별 국가에 미치는 영향력이 압도적으로 커졌어요. 국가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아요, 지금은. 이것도 마찬가지로 맑스 당시와는 달라진 인간 사회라는 자연 속의 힘의 변동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 사회과학도 업데이트돼야 되는 거죠. 당연한 거죠. 그래서 사회과학은 반드시, 또는 정치경제학은 반드시 업데이트돼야 된다, 그 다음에 맑스의 정치적 주장, 굉장히 많은 것들이 있잖아요. 내가 어설프다고 표현했지만 그 주장들은 그 업데이트된 사회과학에 기초해서 수정되어야 한다, 그게 기본적으로 과학 정신입니다. 사회과학 정신이기도 하고요. 자, 문제는 뭐냐면 그 일을 누가 할 거냐? 그래요, 업데이트 누가 할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거 할 사람은 성공회대학교밖에 없다. 성공회대학교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할 거냐?
성공회대학교는 예전에는 교수들의 대학이었지만 지금은 시민들의 대학이에요. 진보를 열망하는 시민들의 대학이에요. 그 책임은 누가 져요? 성공회대학이 져야지, 당연히. 업데이트 책임은 우리한테 있다. 당연히 있다. 물론 여러분들도 있고 교수들에게도 나한테도 있지만, 어쨌든 그렇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칸트의 유명한 말을 제가 짜깁기해서, "실천 없는 사회과학은 공허하지만 사회과학 없는 실천은 맹목적이다." 그러니 성공회대학교가 이 사회과학을 계속 발전시켜야 한다. 마치겠습니다.
출처: https://steinerinstitute.tistory.com/entry/철학으로서의-맑스-과학으로서의-맑스-김진업?category=713536[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티스토리]
https://steinerinstitute.tistory.com/entry/%EC%B2%A0%ED%95%99%EC%9C%BC%EB%A1%9C%EC%84%9C%EC%9D%98-%EB%A7%91%EC%8A%A4-%EA%B3%BC%ED%95%99%EC%9C%BC%EB%A1%9C%EC%84%9C%EC%9D%98-%EB%A7%91%EC%8A%A4-%EA%B9%80%EC%A7%84%EC%97%85?category=713536
communistleft 님 한테 받음
과학철학
철학으로서의 맑스, 과학으로서의 맑스 – 김진업 슈타이너사상연구소
퇴임사 비슷한 거 하나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졌는데, 얼마 전에 우리 학보사의 기자가 저한테 인터뷰 요청하는 메일이 왔어요. 그래서 아마도 은퇴 소감을 묻나 보다, 하고 메일을 열어봤더니 그게 아니고 "선생님 나가시고 나면 우리 학교의 정치경제학 강의가 없어질 것 같은데 그게 좀 두렵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하고 저한테 의견을 물으러 왔길래 제가 "아니 그건 남아 있는 선생님들한테 묻는 게 맞을 것 같다. 나는 곧 나갈 거니까." 그렇게 얘기하고 인터뷰를 거절을 했어요.
그러고 나서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어, 가만히 있어. 내가 나가면 정치경제학 강의가 없어질지도 모른다고?' 이런 생각이 갑자기 드는 거예요. 그리고 2007년인가 8년도에 김수행 선생님이 서울대학교를 퇴직하셨을 때 그때 논란이 됐어요. 아마 그 시기에 어떤 논란이 있었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을 것 같지는 않은데, 말하자면 서울대학교 경제학 교수가 굉장히 많은데 점차 정치경제학을 강의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는 거예요. 전임 중에는 김수행 선생님이 유일했고, 그래서 김수행 선생님이 퇴임하면 그 후임으로 정치경제학을 전공한 사람을 뽑아야 되겠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제법 있었는데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러면 나도 학교에다가 "정치경제학 선생님을 좀 뽑아주세요"라는 말을 목소리라도 한번 내보고 퇴임을 하는 게 맞겠다 싶어서 그 얘기를 좀 해보려고 그러다 우선 정치경제학이라고 하는 건 왜 공부해야 되나, 다른 경제와 관련된 굉장히 많은 것들이 있는데 그걸 왜 공부해야 하나, 인식을 먼저 해야 할 것 같고요. 그리고 특별히 성공회대학교가 정치경제학 강의를 지켜야 되는 이유로 이 생각에 이 질문을 좀 답을 해봐야 될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해 보니까 여기 학교에 95년도에 왔는데 94학년도에 1994학번이죠, 이 친구들이 성공회대 사회학과의 1기였어요. 그런데 그 뒤에 1999년도에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가 만들어졌고, 그러고 나서 그때부터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에 진보적인 교수들이 제법 있었기 때문에 학교가 나름대로 유명해지기 시작했어요. 이른바 성공회 학파라고 불리기도 했고요. 그리고 진보의 메카, 좌파 사관학교 (청중 웃음) 조금 그렇긴 한데 어쨌든 그런 이름으로 불리면서 우리 학교가 제법 유명해졌어요.
근데 학교가 유명해지니까 재미있는 현상이 하나 생겨났는데 우리 학교를 소신 지원하는 학생들이 많아지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이 소신지원한 학생들의 부모들 중에는 우리 사회에서 굉장히 고생을 많이 한 노동운동가 또는 사회운동가, 이런 부모들에게 등떠밀리거나 아니면은 부모님과 함께 손잡고 이 학교에 온 학생들이 제법 많아지기 시작한 거예요. 그래서 생각해 보니까 이 성공회대학교를 저는 처음에는 이게 교수의 대학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조금 시간이 지나다 보니까 이건 학생의 대학이 되었고 학부모의 대학이 됐고 결국은 우리나라를 조금이라도 발전시켜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대학이 되어 있었어요. 정말 놀랐어요.
그래서 이 학교를 지키는 일은 성공회대학교의 교수나 학생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를 조금이라도 개선해보려고 하는 사람이 요청하는 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제가 그래서 '성공회대학교는 사회과학을 지켜야 되고, 정치경제학을 지켜야 된다'라는 생각을 여러분과 함께 공유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맞습니까? (예)
근데 아마 그냥 얘기하면 여러분들이 일단 질문을 해야 될 거예요. 정치경제학이 뭐길래 '진보'라는 단어하고 연결이 돼 있나, 이런 생각 한번 해봐야 되잖아요. 여러분들은 정치경제 그러면 맑스의 경제학, 이런 뜻으로 대충 이해하고 있을 겁니다. 그러면 경제학이라고 하는 걸 스미스한테 배워도 되고 리카르도한테 배워도 되는데 왜 하필 맑스야? 그 사람의 주장이 특별히 좌파적이라서? 또는 좌우가 균형을 이루어야 되니까? 이런 생각 때문에 정치경제학을 공부하는 건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제법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 입장은 조금 다른데요. 정치경제학이라는 단어는 원래는 스미스와 리카르도가 최초로 경제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자신들의 학문에 이름을 붙이기를 "우리는 정치경제 한다" 이렇게 얘기를 했던 거예요. 그래서 정치경제학이라는 단어가 경제학이라는 단어보다 훨씬 먼저 나왔던 거죠. 그래서 경제학을 최초로 공부하고 연구서를 낸 사람들이 아담스미스, 리카르도인데 맑스가 그걸 공부하면서 보니까 '아, 이 사람들은 정말 과학자 맞다. 과학자 맞는데 좀 불충분하다.' 그래서 맑스가 스미스와 리카르도의 이론을 내재적 비판을 통해서 자본주의가 뭔지,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뭔지에 대해서 잘 연구한 다음에 자본론을 쓰게 되거든요. 그런데 이 자본론의 부제가 '정치경제학 비판'이에요. 여기서 정치경제는 당연히 아담 스미스와 리카르도를 얘기하는 거죠.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거냐 하면 자본론에서 맑스는 '나의 자본주의에 관한 이론은, 스미스나 리카르도도 제법 과학적으로 썼지만, 나의 이론은 훨씬 더 과학적이다.' 이렇게 주장을 했던 거예요. 말하자면 '과학'이라는 단어에 방점이 찍혀 있는 거죠.
근데 우리가 과학 이론, 그러면 예를 들어 상대성 이론이라든가 뉴턴, 아인슈타인 이런 사람들이 떠오를 거잖아요. 그러면 그 과학 이론에 대해서 그게 이데올로기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혹시나 있나요. 어쩌면 철학을 너무 열심히 한 사람 중에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간혹 있어요.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학이라고 하는 거는 이데올로기와 달리 객관적인 이론이고 이데올로기는 주관적일 수 있는 이론이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렇잖아요? 그래요. 맑스는 스스로 과학자라고 생각을 했던 거죠.
말하자면 자기의 이론이 과학 이론이라고 생각을 했으니까.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죠.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인류는 맑스를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있지 않습니다. 맑스는 과학자로 기억되는 게 아니라 사상가, 철학자 또는 이데올로그(이데올로기를 주장하는 사람) 정도로 이해되고 있는 거죠. 예컨데 bbc가 지난 천 년 동안 인류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철학자가 누구냐, 설문 조사를 했는데 맑스가 뽑혔어요.
당연히 그렇겠죠. 성경보다 더 많이 팔린 유일한 책이 '자본론'이니까 그럴 수 있죠. 근데 문제는 bbc가 맑스를 과학자라고 얘기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당연한 것 같지만 저는 굉장히 섭섭합니다. 굉장히 섭섭한데, 맑스를 이데올로그 또는 어떤 특별한 철학자, 좌파 철학자,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은 지금 여기 있는 모두에게도 어쩌면 공유되는 건지도 모릅니다. 예컨대 런던 교외에 가면 하이게이트라고 하는 공동 묘지가 있는데, 거기 맑스 묘지가 있거든요.
거기 공원 관리하는 사람들이 가끔씩 골치를 썩이는데, 왜냐하면 거기에 빨간 걸로 이렇게 낙서를 해놔요. 근데 맑스 묘비에다가 써놓은 낙서의 내용이 뭐냐면 "증오의 교리를 만들었다. 그래서 이 사람 때문에 인류가 굉장히 많은 갈등을 겪었다." 이런 거죠. 교리라는 말은 사실 이데올로기란 말이거든요. 독단적인 이데올로기라는 뜻이거든요. 여하튼 그렇게 맑스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 사람, 약자 편이라고 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긴 하지만 사회과학자 입장에서 봤을 때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냈다, 과학이 아니고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냈다, 그러면 이건 사실은 욕이죠.
약자 편이라고 하는 게 도덕적으로는 좋은 건지 모르지만 학자의 입장에서는 욕입니다. 여튼 그런데 맑스의 묘비명을 보면 이데올로기라는 말과는 전혀 반대되는 말이 적혀 있어요. 묘비명에 적혀 있는 걸, 여러분들 아마 "전 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이걸 먼저 떠올리겠지만 그 밑에 작은 글씨로 써 있기를, "지금까지의 모든 철학은 세계를 해석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실천이다. 세계를 변혁하는 거다." 이렇게 써 있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 귀절을 읽고 나서 대개는 '아, 이론보다 실천이 더 중요해'라고 생각하기가 쉬워요. 그런데 그 귀절이 어디에 쓰여 있는 거냐면 맑스의 '독일 이데올로기'라고 우리나라에 한글로도 번역돼 있는 책이 있어요. 거기에 그 맥락을 잘 살펴서 보면 "학문은, 지금까지의 학문들은 세계를 해석하기만 했는데 앞으로 내가, 지금부터 할 학문은 세계를 해석하는 학문이 아니라 세계를 변혁할 수 있는 실천적인 학문을 할 거다, 내가. 이래서 앞으로 내가 쓰는 글들은 말하자면 세계를 실천적으로 변혁할 수 있는 그런 학문을 하겠다."라는 선언을 그 앞에서 하고 있는 거죠.
그런데 그 학문이 실천적이다, 라는 게 무슨 뜻일까? 너무나 당연하게 우리는 학문은, 그걸 대표하는 게 철학이죠, 세계를 해석하는 거라고 생각을 해 왔었는데 학문을 실천적인 학문으로 만든다라고 하는 게 무슨 뜻일까? 질문을 해야 되거든요. 근데 그 질문에 대해서 제일 쉽게 답을 해주신 분이 우리 신영복 선생님이에요.
여러분들, 신영복 선생님의 목수 이야기를 혹시 아시나요? 들어보신 분 있을 거예요. 그 그림, 멋진 그림 있잖아요. 집 그림이 하나 있어요. 신영복 선생님의 서화집 같은 데 보면 집을 하나 그려놨는데, 그 그림에 대한 해설이 뭐냐면 감옥에서 만난 늙은 목수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자기 자랑을 하다가 "내가 옛날에 이런 집도 지었단 말이야" 그러면서 나뭇가지로 이제 운동장에다가 그림을 그리는데 제일 먼저 주춧돌을 그린 그리는 거예요.
주춧돌을 그리고 기둥을 그리고 그 다음에 서까래를 그리고 기와를 그리고, 집 짓는 순서하고 그림 그리는 순서가 똑같다는 거예요. 이게 왜 놀라운 일이냐면 보통 우리가 먹물들, 철학자죠, 먹물들은 그림을 그릴 때 위에서부터 아래로 그립니다. 그런데 일하는 사람들은 일하는 순서, 작업 순서대로 그림을 그리더라는 거죠. 이게 뭐예요. 이게 바로 실천적 학문이거든요.
왜 이게 실천적 학문이냐? 지붕 먼저 그린다라고 하는 건 자연의 원리에 어긋나는 거예요. 자연은 기둥 없는 지붕을 허용하지 않아요. 그렇잖아요. 그럼 이 자연의 원리를 이해하는 학문이 바로 실천적 학문이예요. 그게 뭐예요? 다 아시잖아요. 그쵸? 그게 과학이잖아요. 그게 과학이거든요. 그런데 철학이 왜 맑스 입장에서는 비판받아 마땅한 학문이냐? 세계를 해석하는 게 왜 문제냐? 그건 여러분들이, 예를 들어 한때 유행했던 말 중에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 아시잖아요. 우리 젊은 친구들은 그걸 비아냥거리려고 "아프리카 청춘이다"라고 그래서 그게 무슨 말인가 그랬더니, 그건 비아냥거리는 말이었더라고요.
아프니까 청춘이다... 그런데 철학은 바로 그런 거 거든요, 맑스가 보기에는. 제가 보기에도 어느 정도 그 말이 맞는 것 같고요. 어떤 뜻이냐 하면 세계를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우리를 위로해줘요. 위로는 참 고맙기도 해요. 그러나 잠시에요. 실제 문제는 해결되지 않아요. 따라서 철학이 우리한테 위로해주는 건요, 위로해준답시고 하는 이 말들은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덮는 데 그 역할을 하게 돼요. 위로 받았으니까. 그렇잖아요.
이게 바로 지금까지 철학은 세계를 해석하기만 했다, 문제는 세계를 바꿔내는 거다, 라는 맑스의 이야기입니다. 심리적 위로라고 하는 것은 물론 우리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나도, 나조차도 시를 좋아하고 노래를 좋아하고 위로를 받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건 위로로 끝나야지, 세계에 대한 설명이 되어서는 대단히 곤란합니다. 그게 세계에 대한 설명이 되는 순간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문제들을 덮어버리는데, 그래서 결국은 현재 있는 세계를, 주어져 있는 세계를 정당화하는 일에, 본인은 아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기여하게 된다는 거죠.
그래서 맑스는 철학을 이데올로기다, 라고 비판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고 보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실천적인 학문, 목수와 같은 그림이 필요한 거죠. 목수와 같은 그림을 그리는 작업 순서 같은 게 필요한 거죠. 그게 뭐라고요? 과학이죠. 맑스는 당시에 자연과학이 제법 발전하고 있던 시대를 살고 있었어요. 자연과학의 문제에 대해서 제법 많이 알고 있었어요. 맑스가 자연과학을 공부했다는 게 별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많이 공부했어요.
근데 자연과학의 특징은 뭐냐면, 예를 들어서 병에 걸렸을 때 자연과학이 아닌 의학 기술은 이른바 대증 요법을 쓰죠. 몸에 열이 나면 몸을 식혀준다든지 하는 방식이죠. 근데 과학은 그 원인을 찾아나섭니다. 대장균 때문이다. 이게 밝혀지면 어떻게 하면 대장균이 더 증식하지 않을 수 있는지, 그 방법들을 찾아내서 치료를 하는 거죠. 문제를 해결하는 겁니다. 원인을 찾아내기 때문에 우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는 거죠.
물론 원인을 찾았다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대개의 경우는 그렇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원인을 찾아내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이유는 뭐냐하면,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모든 것과 인과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인과관계라고 하는 게 자연에 존재하는 원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원인을 통제하면 결과를 막을 수 있다, 이런 거죠.
물론 인과관계라는 게 1대 1로 매칭되지 않는다는 거 여러분들 잘 알고 있어요. 굉장히 많은 원인들이 하나의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고 하나의 결과가 여러 가지 원인들을 만들어 낼 수 있고, 어떤 원인은 다른 원인을 만나서 세상에 아무런 결과가 안 나타나게 만들 수도 있어요. 굉장히 복잡한 거죠. 그거 하나하나 다 까져나가야 되는 거죠. 그래서 자연과학에서 원인을 찾는다, 라고 하는 건 원인이라는 것, 자연과학에서 원인이라는 것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힘이라는 뜻과 같아요. 그래서 원인이라는 말은 인과적 힘이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는 거죠.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힘이다. 이런 거죠, 원인이.
다른 걸 얘기하면 자연과학은 자연에 존재하는 인과적 힘들을 찾는 겁니다. 그래서 자연에 있는 모든 객체와 사물을 그 속성이 있다고 우리는 얘기하잖아요. 보통 객체는 다른 객체와 속성에 의해서 구별되는 거잖아요. 여기서 속성이 뭐겠어요. 자연과학자들은 그걸 그 객체가 가지고 있는 인과적 힘이라고 말을 하는 거죠. 자연과학은 객체에 존재하는 인과적 힘과 그 힘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느냐에 대해서 연구하는 학문이다. 원인과 그 원인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결과를 충분히 컨트롤할 수 있다. 통제할 수 있다. 이렇게 맑스는 과학을 이해했던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맑스의 과학 이해는 당대의 철학자들이 과학을 이해하는 것과 전혀 달랐어요. 근데 문제는 뭐냐하면 오늘날까지도 철학자들은 맑스 당대의 과학철학자들처럼 과학이라고 하는 게 뭔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나름대로 자기네들이 과학이 뭐라고 얘기를 하고 있는데, 많은 해석을 하고 있는데, 실제로 과학이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얘기하고 있지 않아요, 오늘날에도. 예를 들면 여러분들이 잘 아는 얘기 중에 과학은 경험되는 사실, 물리력이죠, 사실들의 규칙성을 찾는 거다, 물리력을 수학적 방정식으로 만들어 내는 거죠.
어떻게 보면 많이 맞는 것 같아요. 물리력을 수학적으로 표시하는 게 자연과학에서는 자연 법칙이니까요. F=ma 이런 식으로, 언뜻 보면 그게 맞아요. 근데 수학은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가 없어요. 여러분이 알다시피 모든 함수의 독립변수와 종속변수는 역함수에 의해서 바뀔 수 있는 거예요. 그게 원인인지, 결과인지 모르는 거예요. 그쵸? 그래서 물리학자들은 F=ma, 여기서 그치지 않아요. F가 원인인지 m이 원인인지 이런 걸 계속 찾아나서는 거거든요. 이게 물리학이라고 하는 과학이 하는 일이에요. 거기에 대해서 철학자들은 F=ma라고 하는 방정식에만 주목하고 있는 거죠.
또 다른 방식으로 과학을 오해하고 있는 게 이른바 여러분들이 제일 즐겨 쓰는 단어, 패러다임, 패러다임에 따라서 사람들이 다르게 세상을 볼 수 있다, 이런 식의 얘기잖아요. 마치 어떤 안경을 끼느냐에 따라서 자연이 다르게 보인다는 얘기잖아요. 그 말을 뒤집어서 얘기하면 과학도 철학처럼 인간에 의해서 세계를 해석하는 거다, 이런 뜻이고요. 이런 말들에 대해서 자연과학을 모르는 사람들은 대단히 열광하죠. "거봐, 과학자들이 객관적이라고 잘하는 척하더니 지들도 결국은 철학이야. 아, 통쾌해." (청중 웃음) 특히 과포자들(과학을 포기한 자들)은 얼마나 통쾌하겠습니까? 수포자들도 통쾌하겠지만. 그렇잖아요.
그런데 이게 웃을 일이 아닌 거죠. 과학자들이 볼 때는 자기들이 하고 있는 과학은 철학자들의 말에 따르게 되면, 내가 발견해낸 중력이라든가 원자라든가 이런 것들은 자연에 실재하는 것들이 아니라 내가 창조해낸 발명품이 돼버려요. 근데 과학자들 중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단 한 명이라도 있을까요? 자연과학자들은 원자가 나의 발명품이다, 라고 얘기하면 아마 과학을 그만두려고 그럴 거예요. 말도 안 된다고. 중력이라고 하는 게 빨간 안경을 끼면 중력이 있다가 파란 안경으로 바뀌면 중력이 없어져? 얘네들이 지금 뭐라는 거야... 자연과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한다고요.
그런데 우리는 과학을 자연과학자를 통해서 이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물론 요즘에는 유튜브를 보면, 제법 그럴 듯하고 정확하게 과학 정보를 전달하는 유튜브들이 있더라고요. 저도 즐겨보는 게 몇 개 있는데 그렇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하여간 과학을 누구를 통해서 이해를 하냐면 철학자를 통해서 이해를 해요. 과학이 뭔지 알려고 그러면 '프린키피아'를 봐야 되는데 그건 넘사벽이잖아요. 그러니까 과학철학 책 만만한 거 가지고 찾아서 봐요. 그러면 우리는 곧바로 과학에 대해서 오해하는 지름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철학자들이 말하는 과학은 정말로, 제가 아무리 열심히 살펴봐도 형편 없어요. 형편 없이 오해하고 있습니다. 여튼 그렇습니다.
과학자들은 자기네들이 자연을 발명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발견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근데 철학자들은 자꾸만 과학자들을 창조자라고 얘기를 하는 거죠. 자기들도 그걸 통해서 창조적이 되고 싶어서 그랬겠지만 그렇게 되었습니다. 근데 자연과학을 이렇게 철학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맑스는 일종의 실천적으로 이해했던 거예요. 자연과학은 병의 원인을 찾아서 결과를 바꿔낸다. 이거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죠.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맑스는 자연과학이라고 하는 거가 인간 사회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는 과학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해요. 사실은 그건 당연한 거죠. 왜냐하면 인간, 사회, 다 자연의 일부잖아요. 그럼 자연을 연구하는 자연과학이 왜 자연의 일부인 인간과 사회를 연구할 수가 없겠습니까? 너무나 당연한 거죠. 단지 철학으로부터 우리가 갖게 된 편견이 그걸 가로막는 거죠. 조금만 생각해보면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당시의 사람들은 맑스의 그와 같은 생각은 터무니없다고 생각했죠. 근데 문제는 당시의 사람뿐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는 어떠냐 하는 거예요. 우리가 인간과 사회가 자연의 일부라고 하는 이 사실을 정말 당연하게 믿고 있는 것처럼 보이세요? 제가 학생들하고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플라스틱이 자연이냐, 아니냐? (학생들이 대답하길,) 아니죠. 그럼 뭐야? 제가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플라스틱이 자연이 아니야? 어떻게 생각하세요? 너무나 당연하게도 우리가 그걸 자연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거든요. 플라스틱이 자연이 아니면 뭐라고 그래요? 그런 거죠.
예를 들면, 도시의 건축물, 당연히 자연이죠. 근데 왜 우리가 이 플라스틱이 자연이다, 라고 하면 너무나 당연한 생각에 의외라고 반응하게 되느냐? 너무나 오랫동안 철학자들이 우리한테 뭘 가르쳐 왔냐면, 인간과 자연은 다르다. 이원, 원래부터 두 가지다. 원래부터 한 가지가 아니라, 원래부터 두 가지다. 물질과 정신은 이원, 원래부터 두 가지다. 한 가지가 아니다. 이 말은 우주가 빅뱅에서부터 진화해서 지구를 통해서, 생물을 통해서 인간에게까지 오는 게 그 이유가 없다, 라고 하는 물리학을 부정하는 말이에요.
여러분들이 과학을 믿으면서, 실제로 과학을 믿는다는 게 어떤 데서 드러나냐면 만약에 대통령이 비가 안 와서 "온 국민들은 광화문 광장에 모이십시오. 지금부터 우주의 기운을 모아서 기우제를 지내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돼요? 탄핵되지. 당연한 거야. 근데 만약에 대통령이 "여러분 비가 안 와서 큰일 났습니다. 댐을 만들 수 있도록 세금을 좀 더 올려야 되겠습니다. 나무를 더 심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지. 그게 뭐예요? 여러분들은 과학을 믿고 있다는 거예요, 실제 행위에서는.
그런데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이상해져요. 생각이, 이제, 생각하면 이상해져요. 근데 그런 증거가 사실은 여러분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 학자들 속에서도 이런 편견이 엄청나게 많이 깔려 있어요. 여러분 사회학 개론 중에서 제일 유명한 책이 '현대 사회학'이라고 하는 베스트셀러 중에 베스트셀러거든요. 안토니 기든스가 쓴 책이에요. 근데 그 책 서문을 꼼꼼하게 읽어보시면 거기에 어떤 귀절이 나오냐면 뭐 어쩌고 저쩌고 하다가 "이런 점에서 사회학은 과학이기도 하고 철학이기도 하다." 이게 뭔 개소리야? (청중 웃음) 과학이기도 하고 철학이기도 하다니? 뭐하자는 거야, 이게? 근데 이게 사회학만 그런 거야?
결국 경제학은, 예를 들면 과학으로서의 경제학은 빈부 격차가 늘어났는지, 줄어들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해줄 수 있다. 그러나 과학으로서의 경제학은 빈부 격차를 줄여야 한다는 말을 할 수가 없다고 써 있어요. 이건 명시적으로 그 사람들이 주장하는 거고 여러분 표정을 보면 '당연한 거 아니야?'라고 생각하고 있단 말이에요, 지금. 말이 안 되는 얘기를 하고 있는데, 사실은.
그래서 예를 들어서 경제학자들은 멋있는 말로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이라는 말을 즐겨서 사용하죠. 어떻게 보면 좋아 보여요. 그러나 내 눈에는 그게 어떻게 보이냐면 '머리와 가슴이 분리돼 있구나.' 냉철한 머리가 어떤 판단을 하면 가슴이 뜨거워질 수 있는 거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가슴이 뜨거워지면 머리도 영향을 받아야 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에요. 이게 어떻게 분리가 돼요. 그런데 마치 자랑스럽게 분리가 가능하다고 얘기하는 거죠.
그래서 간단하게 요약을 하면, 오늘날의 대부분의 주류 학문은 이른바 사실의 과학과 가치의 철학, 이런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한테 아마 굉장히 익숙한 말일 겁니다. 사실과 가치는 유리됐고, 가치를 다루는 건 철학이고, 사실을 다루는 건 과학이다. 여러분 다 동의하잖아요. 그런데 플라스틱은 자연 아닌가요? 가치는 자연 아닌가요? 인간은 자연 아니란 말이에요? 이런 식의 질문들, 그쵸? 바로 이런 식의 질문들입니다. 어쨌든 맑스는 이런 식의 인간, 자연 이원론 또는 물질, 정신 이원론을 철저하게 비판을 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인간이든 가치든 뭐든 간에 모든 것을 자연의 일부로 다루는 거죠. 자연과학의 방법론이 모든 학문 속으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거죠. 자연과학이라고 하는 걸 당시의 사람들은 왜 좋아했냐면, 자연과학은 자연을 변형해서 살기 좋은 자연으로 만드는 보고라고 하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천적 학문이죠. 그럼 당연히 사회과학은 어때야 됩니까? 사회에 존재하는 팀들을 잘 이해해서 사회를 변형해서 살기 좋은 사회로 만드는 보고가 돼야 되는 거죠.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맑스는 믿었던 거예요.
그래서 맑스 입장에서는 자기가 사회과학을 잘 발전시키면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게 될 거라고 믿었던 거죠. 물론 좋은 사회라고 하는 거는 뭘 보고 좋은 사회라고 우리가 얘기하죠? 학생 입장에서는 사회를 변형한다, 궁극적으로 어떤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사회를 변형하는 것, 여러분 거기에 대해서 지금 '맞아, 그게 고민이야'라고 생각한다면 철학자들한테 아주 멋지게 속아 넘어간 겁니다.
우리 모두는 좋은 사회가 뭔지 다 알아요. 정말 모를 것 같아요? 다 알아요.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데요. 그걸 맑스는 뭐라고 표현했냐면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이렇게 얘기했어요. 그걸 조금 풀어서 얘기하면 사회를 사회에 국한해서, 사회라는 자연에 국한해서 풀어서 얘기하면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가 실현되는 사회다", 이걸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 도대체 있겠냐고요? 그러니 사회과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가 실현되는 겁니다.
이게 실현되는 거를 바로 진보라고 얘기를 하는 거죠. 근데 문제는 뭐냐 하면 철학자들이 자유와 평등이라는 것조차도 "이데올로기다, 하나의 주장이다. 하나의 가치 주장이다." 이렇게 얘기한다는 거예요. 이런 주장 속에는 굉장히 오랫동안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를 지배하고 있던 하나의 귀절이 있는데, 그리고 과포자들이 볼 땐 정말 멋있는 귀절인데,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해줄 수 없다." 멋있잖아요. 과포자 만세! (청중 웃음) 근데 과학은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가치라고 하는 건 인간만 갖고 있는 거예요? 아니거든요. 인간이 좀 복잡하게 가치를 갖고 있는 건 맞아요. 근데 여러분들이 침팬지 사회를 조금만 관찰해 보면, '아 저 녀석이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건 금방 알아요. 개만 키워봐도 알아요. 가치가 왜 인간의 전유물이에요? 그렇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생물들의 행동을 잘 살펴보면 거기에 제일 가치는 뭐예요? 생존이에요. 물질들은 아무런 가치 없이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것처럼 보여요. 근데 생물체들은 분명하게 가치 지향적인 행동을 한다는 거예요. 인간만 그런 게 아니라는 거예요. 가치 지향적인 행동을 해요, 인간이라고 하는 동물은, 물론. 인간은 조금 더 복잡해요.
그렇지만 어쨌든 자연을 연구하는 과학은 만약에 우리가 생태계 속의 모든 행동이 분자들의 운동으로 환원되지 않고 생물체들의 활동들이 있다는 걸 인정한다면 생태계라는 자연 속에는 이른바 비가치적 사실만 있는 게 아니라 가치적 사실도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당연히 과학은 자연 현상 중에 하나로 가치 현상을 다뤄야 되는 거죠. 너무나 당연한 게 아닌가요. 마음에 안 드세요? (청중 웃음)
게다가 우리는 흔히 가치와 사실이라고 하는 건, 사실로부터 가치를 추론한다거나 가치로부터 사실을 추론하는 건 논리적 오류라는 건 너무나 많이 배워왔어요. 그렇잖아요. 그래서 가치와 사실은 별개라는 게 머릿속에 꽉 박혀 있어요. 근데 여러분 조금만 생각해 보시면 그게 말도 안 된다는 걸 알 수 있게 돼요. 여러분 생태과학이 발전하고 나서 우리한테 어떤 새로운 가치가 생겼는지 아세요? 생태친화적이라고 하는 가치가 생겨나는 거 아세요, 모르세요? 아시잖아요. 과학이 발전하면, 사실에 대해서 우리가 많이 알게 되면 우리들의 가치 지향도 영향을 받아요. 인과적으로 연결돼 있다고요. 그런데 이거를 철학자들은 딱 잘라버리잖아요. 그러니까 뭐예요? 물질-정신, 인간-자연의 이원론, 이분법이에요.
여기에 속아 넘어가게 되면 사회과학은 절대로 과학으로 발전할 수가 없게 돼요. 동의하시나요? (예) 감사합니다. 자, 그렇게, 그런 속성들 중에 우리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굉장히 많은 인간의 자연적인 속성들이 있습니다. 이 자연적인 속성들 중에 대표적인 게 우리는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물론 개중에 고집스러운 사람도 있지만 입장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 제법 많아요. 웬만하면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힘을 가지고 있어요. 인간의 속성이에요, 자연적 속성.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하는 거가 항상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라고 하는 게 사실은 모든 혁명의 구호, 모든 역사적 반란의 구호였어요.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난 게 자유와 평등이에요. 자유와 평등이라고 하는 건 모든 역사의 혁명 구호였습니다. 이거를 지금 철학자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특정한 집단의 특정한 시대에 주관적인 이데올로기라고 말하는 게 과연 타당할까요? 그렇지 않거든요. 그건 정말로 역사적으로 증명되면 보편적인 거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들은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사회가 가장 좋은 사회고, 이른바 지속 가능한 사회라고 주장하는 거죠. 그러면 혁명가들만 그랬던가?
여러분 종교가, 세계 종교로 발전된 종교는 놀랍게도 그 가르침이 모두 다 똑같아요. 예를 들면, 불교는 부처님처럼 살아라. 그리고 서로서로 자비를 베풀어라. 그리고 기독교는 예수님처럼 살아라. 그리고 이웃을 사랑해라.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이걸 좀 멋진 시로 표현하면 이런 겁니다. 나무처럼 홀로, '자유롭게'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숲처럼 더불어, '평등하게'라는 뜻입니다. 자유와 평등. "나무처럼 홀로, 숲처럼 더불어" 이건 터키 시인의 시에요. 그렇지만 모든 종교 교리를 번역하면 그 시기적으로 얘기할 수가 있게 된다는 겁니다. 이건 인류, 인간종이라고 하는 자연종이 굉장히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던 자연적 속성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아마도 여러분들은 제 얘기를 철학의 이야기로 오해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청중 웃음)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모든 혁명이고 반란이고, 그 다음에 모든 종교들의 가르침이 일치한다는 걸 우리가 이데올로기라고 말하기는 너무 어려워요. 이거는 특정 집단과 특정 세계의 이데올로기라고 말하기는 어렵고, 오히려 그것보다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연적 속성으로 이해해야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인간의 속성은 모든 자연적 객체, 사물들의 속성과 마찬가지로 하나만 있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이기적 속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타적 속성도 가지고 있다. 이타적 속성도 가지고 있고 이기적 속성도 가지고 있다. 이건 분명하게 인정해야 돼요
그러면 질문은 이렇게 바꿔야 됩니다. 인간이 착한 거냐, 악한 거냐? 이건 철학자들이 하는 질문이고요. 과학자들은 뭐라고 질문을 하냐면, 인간은 착한 속성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자유 평등의 가치를 만들어낼 수도 있고, 악한 속성도 가지고 있어. 그래서 지배하려고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어요. 둘 다 있어. 문제는 뭐야, 왜 우리는 이 착한 속성이 실제 사회에서 실현되지 않느냐? 제가 과학이 뭐라 그랬어요? 힘과 힘의 작동 방식에 관한 연구라고 그랬잖아요. 착한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가 실현될 수도 있어야 되는데, 이게 어떤 다른 힘을 만나면 그 힘이 발휘되지 않고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해요. 그러면 우리가 질문해야 될 건 뭐예요?
자유와 평등의 가치, 착한 심성에서부터 비롯되는 자유와 평등의 가치가 어떤 힘 때문에 실현되지 않느냐? 그걸 묻는 게 과학이다, 라고 보는 거죠. 어떤 힘이 이 착한 마음이 이 세상에서 실제로 발현되는 것을 가로막고 있느냐? 또는 반대로 어떤 힘이 인간의 이기적 속성을 부추기고 있느냐? 이걸 연구하는 게 과학이라고 봅니다, 여러분. 실제로 맑스는 그 연구를 했어요. 맑스는 인간이란 무엇이냐, 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아요. 오히려 그거보다는 인간 정신과 인간의 행위에 자연과 사회가 영향을 미치는지, 안 미치는지를 검토한 거예요. 그리고 결론적으로 주어진 자연과 주어진 사회의 힘이 인간의 정신과 인간의 행위에 굉장히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대신에 이 얘기를 하기 위해서는 전제조건이 하나 필요하죠. 모든 인간은 주어져 있는 자연 속에서 살고, 모든 인간은 주어져 있는 사회 속에서 살지만 그 바깥으로는 못 나간다. 자연 바깥으로 못 나가고, 사회 바깥으로 못 나간다. 생존을 하려면 주어져 있는 자연, 주어져 있는 사회, 그런데 그 사회에 살게 되면 인간의 정신과 행위는 주어져 있는 자연과 사회에 영향력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이거예요. 맑스의 결론은 너무나 간단해요. 그게 사회과학이거든요. 그걸 맑스는 주어진 자연을 표현하는 단어가 '생산력'이라는 단어예요. 그리고 주어져 있는 사회를 설명하는 단어가 '생산 관계'예요. 그걸 조금 더 발전시켜서 생산력, 생산 관계, 생산 양식, 토대와 상부 구조... 토대란 말은 생산 양식이란 말과 같아요.
몇 가지의 개념들이 나왔잖아요. 근데 이 어려운 얘기들, 우리한테 필요 없어요. 오늘날 우리는 그걸 다 뭐라고 얘기해요. 사회 구조라고 얘기해요, 사회 구조. 사회 구조가, 여러분 구조적 힘이라는 걸 많이 쓰잖아요, 사회 구조가 우리를 이런 방식으로 행동하게 만든다, 사회 구조가 우리를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다들 알고 있는 얘기잖아요. 이 얘기의 원조가 누구냐고요. 맑스예요. 그게. 이렇게 생각하게 만든 원조가 맑스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맑스의 이론을 철학이라고 얘기하는 건 너무나 부당해요. 어떤 힘이 어떤 힘과 만나서 어떤 결과를 만드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사람 보고, 당신은 철학자라고 얘기한다면 죽어서 관에 있다가 깜짝 놀라서 뛰어 나올 거예요. (청중 웃음) 그거 아니고요. 그거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의미에서 보자 그러면 맑스의 학문은 최초의 사회과학, 진정한 의미의 최초의 사회과학이라고 불러도 조금도 틀리지 않을 겁니다. 실제로 그게 자본론에서는 어떤 식으로 나타나게 되냐면, 자본주의라는 사회 구조의 힘이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한테 어떤 영향력을 미치는지를 분석하는 책이에요, 자본론이라는 게. 그리고 오히려 부수적인 얘기지만 그 다음에 또 한 가지 나오는 얘기는 뭐냐 하면, 자본주의라는 사회 구조의 힘은 자본주의라는 사회 구조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자유와 평등을 실현할 수 없게 만든다, 라는 게 결론이에요.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자유와 평등이 실현된다고 얘기하잖아요. 자본주의가 아무리 엉망진창이 되더라도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잠깐만 기다려봐, 국가가 개입해서 개인이 망가진 거야. 그냥 내버려두면 정말 잘 살게 될 거야. 자유롭고 평등하게." 근데 그게 아니라는 걸 과학적으로 명론화한 책이 자본론입니다. 그렇지만 거기서 방점을 찍어야 될 점은 어떤 거냐면, 자본론의 결론이 아니라 자본론은 사회 구조라는 힘이 인간의 정신과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힘이다, 그걸 이해하는 거라는 거죠.
그렇지만 이제 조금 생각해 보시면, 아까 목표가 좋은 사회를 만드는 거다, 고 얘기했는데 과학도 궁극적으로는 좋은, 살기 좋은 자연을 만드는 거라는 걸 여러분들은 아마 개별 과학자들을 통해서 그 말은 엉터리라고 생각할 거예요. 개별 과학자들은 그럴 수 있어요. 그러나 과학이라고 하는 건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는 건데 결과에 관심 없이 원인을 찾으려고 할까요. 이런 거예요. 과학이라고 하는 게 결과에 관심이 없다면 왜 원인을 찾으려고 그러겠어요. 그래서 만약에 우리가 공적인 과학자 세계가 있다고 한다면, 사적 이해관계에 휘둘리는 과학자가 아니라, 공공의 과학자 집단이 있다면 그 사람들은 좋은 결과가 뭐냐에 대해서도 생각할 거라는 뜻입니다. 어쨌든 간에, 과학이라고 하는 건 결과에 관심을 갖고 있는 거고, 특별히 사회과학은 결과에 엄청난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좋은 사회를 만들려고 하는 궁극적인 목적을 가지는 건데, 문제는 과학이 사회를 해방시킬 수는 없다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과학이 사회를 해방시킬 수 있다, 그러면 뉴턴이 벌써 기후 위기 문제를 다 해결했겠죠. 그럴 리가 없잖아요. 회복시킬 수 없죠. 자연을 직접적으로 변형하는 거는 사람의 실천입니다. 그걸 우리가 노동이라고 부르고 있죠. 그리고 사회를 직접적으로 변형하는 건 실천입니다. 그걸 우리 뭐라고 불러요? 정치죠. 정치적 행위자, 정치와 노동이라고 하는 게 바로 직접적으로 자연과 사회를 변형시키는 활동입니다. 그러나 노동과 정치라고 하는 실천이 자기가 의도한 결과를 만들어내려고 한다 그러려면 반드시 과학의 도움을 받아야 되는 거죠. 과학은 존재하는 힘과 힘의 작동 방식을 가르쳐주니까 그걸 통해서 우리는 원하는 결과, 원하는 노동, 원하는 정치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거죠.
바로 그래서 맑스라고 하는 과학자는, 사실은 사회과학자 모두가 그런 거지만 실천과 분리되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실천 문제를 떠나서 과학만 한다는 게 거의 불가능한 거죠. 자나 깨나, 그럴 수밖에 없어요. 맑스도 마찬가지로, 그래서 이른바 맑스는 혁명가다, 라고 많이 들어본 얘기잖아요. 물론 나는 맑스는 혁명가다, 라는 얘기에 괄호를 칩니다. 어쩔 수 없이 혁명가가 된 거지, 타고난 혁명가는 아니다. 맑스는 타고난 과학자다. 이게 제 지론이지만 어쨌든 실천과 분리될 수는 없는 거죠. 근데 문제는 뭐냐면 과학이 자연에 존재하는 힘들, 그 힘의 작동 방식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했지만 자연에 존재하는 힘들 중에 극히 일부분만을 발견하고 있잖아요.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완전하게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힘들을 다 찾아내고 그 힘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를 알아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에요. 이건 시간이 지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자연 자체가 계속 변하고 있기 때문에, 우주 자체가 진화한다는 말은 우주 속에 새로운 자연적 힘들이 계속 만들어진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안 되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가 아직 그러니까 과학이 발전했다고 하더라도, 아직 알지 못하는 굉장히 많은 자연의 힘들이 작동하고 있다는 걸 인정해야 돼요. 그러면 우리는 과학이 완전히 발전할 때까지 실천을 멈춰야 될까요? 기다려야 될까요? 그럴 수 없잖아요. 그러니 우리는 비록 불확실하지만 선택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죠. 이게 바로 정치입니다.
그래서 정치는 실패할 수 있는 확률이 대단히 높은 거죠. 그러나 과학의 도움을 받아서 실천하는 정치가, 실패할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게 최선이라고 하는 걸 부정할 합리적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게 100% 확실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살아남으려면 일단 실천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 그게 바로 정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과학자로서의 맑스의 글 속에는 과학적 주장만 들어 있지 않아요. 굉장히 많은 어설픈 정치적 주장들이 들어 있습니다. 어설픈 정치적 주장들이 들어 있어요. 안 그럴 수가 없는 거예요. 그걸 여러분들이 인정한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될 일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맑스의 과학적 주장과 맑스의 정치적 주장을 잘 구별할 수 있어야 되죠.
아까도 얘기했지만 자연과 사회라고 하는 건 결코 고정돼 있지 않습니다. 지금도 계속 진화하고 있습니다. 바이러스 계속 변종 나오는 거 여러분 아시잖아요. 근데 인간 사회라고 하는 건 자연보다 훨씬 더 빨리 변화해요. 여러분 세대 차이를 느끼잖아요, 우리가. 세상이 얼마나 빨리 변합니까. 그런 겁니다. 근데 인간 사회가 변동한다는 건 결국 어떤 뜻이냐면 인간 사회 안에 존재하는 힘과 힘들의 작동 방식들이 계속 변한다는 뜻입니다. 무슨 뜻이에요? 사회과학은 맑스에게 물어보고 와서는 안 된다는 뜻이에요. 맑스의 사회과학은 계속해서 업데이트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에요. 너무나 당연한 거죠. 그런데 현실 속에서는 이게, 이 당연한 대로 되지 않죠. 맑스를 신봉, 신처럼 모시는 분들이 얼마나 많아요.
야, 맑스 사진을 밟지도 마. (청중 웃음) 장난쳐요? 자본론 찢어서 휴지로 써도 됩니다. 맑스가 좋아할 겁니다. 어쨌든, 예를 들면 이런 거죠. 맑스 당시에 혁명이라는 얘기를 하면서 혁명은 대중들의 일종의 폭동 형태로 나타날 거다, 이런 식의 얘기를 하잖아요. 당시의 대중을 생각해 보세요. 문자를 가지고 있습니까? 보통 선거권을 가지고 있습니까? 대중들은 유일하게 주체라고 한다면 동물적인 행동을 하는 저항 주체로서 밖에 존재하지 않았어요, 당시에 대중은. 당연한 거잖아요, 여러분. 일자무식인데? 그렇잖아요. 근데 여러분, 오늘날 대중은 어때요? 문자 다 가지고 있어요. 보통 선거권 다 가지고 있어요. 자기들끼리 토론하고, 자기들끼리 소집단 만들고, 시민사회단체 만들고 정당까지 만들어요. 이런 대중들이 당시의 대중하고는 완전히 달라진 거잖아요.
다른 말로 얘기하면, 사회가 변한다는 말은 사회 속에 존재하는 힘과 힘들의 작동 방식이 변한다는 거예요. 거기에 맞게 사회과학이 업데이트가 되어야 하는 거죠. 당연하죠.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맑스 당시에 이미 세계라고 하는 경제는 기본적으로 세계적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는 걸 알고는 있었어요. 그러나 오늘날 세계 체계는 당시 맑스 당시의 세계 체계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조직화돼 있을 뿐만 아니라 조직화돼 있기 때문에 세계 체계가 개별 국가에 미치는 영향력이 압도적으로 커졌어요. 국가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아요, 지금은. 이것도 마찬가지로 맑스 당시와는 달라진 인간 사회라는 자연 속의 힘의 변동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 사회과학도 업데이트돼야 되는 거죠. 당연한 거죠. 그래서 사회과학은 반드시, 또는 정치경제학은 반드시 업데이트돼야 된다, 그 다음에 맑스의 정치적 주장, 굉장히 많은 것들이 있잖아요. 내가 어설프다고 표현했지만 그 주장들은 그 업데이트된 사회과학에 기초해서 수정되어야 한다, 그게 기본적으로 과학 정신입니다. 사회과학 정신이기도 하고요. 자, 문제는 뭐냐면 그 일을 누가 할 거냐? 그래요, 업데이트 누가 할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거 할 사람은 성공회대학교밖에 없다. 성공회대학교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할 거냐?
성공회대학교는 예전에는 교수들의 대학이었지만 지금은 시민들의 대학이에요. 진보를 열망하는 시민들의 대학이에요. 그 책임은 누가 져요? 성공회대학이 져야지, 당연히. 업데이트 책임은 우리한테 있다. 당연히 있다. 물론 여러분들도 있고 교수들에게도 나한테도 있지만, 어쨌든 그렇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칸트의 유명한 말을 제가 짜깁기해서, "실천 없는 사회과학은 공허하지만 사회과학 없는 실천은 맹목적이다." 그러니 성공회대학교가 이 사회과학을 계속 발전시켜야 한다. 마치겠습니다.
출처: https://steinerinstitute.tistory.com/entry/철학으로서의-맑스-과학으로서의-맑스-김진업?category=713536[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티스토리]
https://steinerinstitute.tistory.com/entry/%EC%B2%A0%ED%95%99%EC%9C%BC%EB%A1%9C%EC%84%9C%EC%9D%98-%EB%A7%91%EC%8A%A4-%EA%B3%BC%ED%95%99%EC%9C%BC%EB%A1%9C%EC%84%9C%EC%9D%98-%EB%A7%91%EC%8A%A4-%EA%B9%80%EC%A7%84%EC%97%85?category=713536